짧게 말하면
- Phaedra → Rubycon → Ricochet → Stratosfear → Force Majeure. 이 순서대로.
- 앨범마다 한 곡씩 골라, 제대로 된 스피커로 끊지 말고 끝까지 듣는다.
- Zeit, Electronic Meditation, Cyclone 과 영화음악은 다음 달에 듣는다.
- 다섯 장 가운데 한 장은 반드시 귀에 걸린다. 늘 그렇다.
탠저린 드림은 58년 동안 100장이 넘는 앨범을 냈고, 거쳐 간 멤버만 15명이 넘는다. 이 밴드에 좀처럼 발을 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다. 목록을 열어 아무거나 골랐더니 1990년대 영화음악이거나 1972년에 나온 70분짜리 드론이다. 그러면 내 취향이 아니라며 덮어 버린다. 사실은 취향에 맞을 공산이 크다. 첫 장을 잘못 골랐을 뿐이다.
탠저린 드림을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쓰는 글이다. 다섯 장을 순서대로 놓고, 장마다 어느 곡부터 틀지 짚어 준다. 순서를 지키는 데는 까닭이 있다. 앞 장을 듣고 나면 다음 장을 들을 귀가 생긴다. 끝에는 다음에 들을 앨범들과 시대별 지도를 붙였다. 그것만 있어도 그 많은 목록이 더는 벽처럼 보이지 않는다.
듣기 전에
- 헤드폰이나 제대로 된 스피커로 듣는다. 이 음악은 낮은 음과, 두 스피커 사이의 빈자리에서 일어난다. 휴대전화 스피커로 들으면 남는 게 없다.
- 한 곡을 끝까지 듣는다. 곡이 15분, 20분씩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처음 5분은 곡의 입구를 여는 문일 뿐이다.
- 틀어 놓고 다른 일을 한다. 책을 읽어도 좋고, 걷거나 밤길을 운전해도 좋다. 귀를 곤두세운다고 더 들려주는 음악이 아니다.
다섯 장을 순서대로

Phaedra
전설의 시작. 다들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게 맞다. 짧은 음형을 끝없이 반복하는 기계, 그러니까 시퀀서가 음악의 한복판으로 들어온 앨범이다. 그 유명한 사고가 담긴 판이기도 하다. 추운 영국 스튜디오에서 무그의 음이 스르르 어긋났고, 밴드는 그걸 그대로 뒀다. 음악사에는 필연이 아닌 우연이 예상치 못한 성공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티비시리즈 엑스파일의 전설적인 오프닝 멜로디도 그러했다. 타이틀곡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이 음악이 정말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뭔가 걸렸다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라도, 계속 가면 된다. 난 이들의 음악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듣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음악이 이끄는 심연 속으로 그저 빨려들어갈 뿐이다.

Rubycon
한 해 뒤, 같은 세 사람이 이번에는 작정하고 같은 일을 한다. 판 한 면에 한 곡씩, 17분짜리 두 곡이다. Phaedra 가 더듬더듬 제 모양을 찾아갔다면, Rubycon 은 불을 켜지 않아도 가구가 어디 있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걸어 들어온다. 오랜 팬 가운데는 이 앨범을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다. 가장 완성도 높은 판인 것만은 틀림없다. 두 번째로 들으면 한 해 사이에 무엇이 여물었는지 들린다.

Ricochet
실황 앨범이고, 이 음악을 배경음악쯤으로 아는 사람에게 틀어 줄 판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대성당과 공연장에서 녹음해 스튜디오에서 이어 붙였다. 앞의 어느 앨범보다 빠르고 단단하다. Part Two 에서 프랑케가 시퀀서를 몰아붙이는 대목은 이 밴드가 록에 가장 가까이 간 순간이다. 앞의 두 장이 풍경이었다면 이 앨범은 날씨다.

Stratosfear
이제 선율이 들어온다. 기타와 하모니카,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따라 흥얼거릴 수 있는 멜로디. 곡은 짧아지고, 두 곡이던 것이 네 곡이 됐다. Stratosfear 는 시퀀서만으로 짓던 시절과, 짜임새를 더 갖추고 미국 색이 짙어진 1980년대 음악을 잇는 다리다. 네 번째에 들어야 이 변화가 타협이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게 들린다.

Force Majeure
바우만이 떠나고 드러머가 들어왔다. 첼로 소리도 들린다. 고전기 끝자락의 앨범으로, 규모가 크고 관현악에 가까워 교향곡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 밴드가 가장 밴드답게 들리는 판이기도 하다. 1980년대로 넘어가기 전에 꼭 들어야 할 마지막 앨범이고,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네기에도 좋다.
다섯 장, 2시간. 그다음은
다섯 장을 다 듣고도 더 듣고 싶다면, 이제는 혼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다. 갈래는 크게 둘이다. Phaedra 와 Rubycon 이 가장 좋았다면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클라우스 슐체에게로 건너간다. 그 소리를 혼자서 40년 동안 밀고 나간 사람이다. Stratosfear 와 Force Majeure 가 더 좋았다면 거꾸로 앞으로 나아가 영화음악과 1980년대 초를 듣는다. 어느 쪽이든 아래 지도를 보면 길을 잃지 않는다.
핑크 시절
Ohr 레코드의 분홍 라벨. 드론과 소음, 우주를 떠도는 듯한 즉흥연주. 듣기 버겁지만 가끔 굉장하다.
버진 시절
시퀀서의 시대. 이 글에 나온 다섯 장이 모두 여기 있다. 한 시대만 파고들겠다면 이때다.
블루 시절
디지털 장비, 짧아진 곡, 영화음악. Thief, Tangram, Hyperborea. 1987년에 프랑케가 떠난다.
프랑케 이후
프뢰제가 2015년까지 새 멤버들과 밴드를 이끌었고, 그 뒤는 토르스텐 퀘슈닝이 맡았다. 들쭉날쭉하지만 2017년 이후로는 분명히 빛나는 순간이 있다.
다음에 들을 것들
나빠서 뒤로 돌린 게 아니다. 첫 장으로 고르면 안 되는 앨범들이다. 하나같이 누군가는 가장 아끼는 앨범이고, 또 누군가는 이 앨범 때문에 이 음악을 다시 찾지 않았다.




어디서 구하나
이 글에 나온 음반을 구하는 곳이다. 새 CD·LP 는 Amazon 에서, 옛 판과 중고는 Discogs 에서 찾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