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콩코르드 광장. 불 밝힌 오벨리스크 둘레로 가로등이 별처럼 번지고, 앞쪽에 젖은 돌바닥이 깔려 있다Photo: Henry_Marion from Paris, France (Flickr https://www.flickr.com/photos/henry_marion/15480756962/) · Wikimedia Commons · CC BY-SA 2.0
Places · No. 30

1979년 7월 14일, 콩코르드 광장

1979년 혁명 기념일 밤, 장 미셸 자르의 콩코르드 광장 무료 공연. 관객은 그날 기자의 말로 15만, 자르의 말로 100만이다.

짧게 말하면

1836년 10월 25일, 콩코르드 광장 한가운데로 돌기둥 하나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 앞에 3,300년을 서 있던 오벨리스크다. 이집트의 통치자 무함마드 알리가 1829년 프랑스에 선물했고, 1833년 12월에야 파리에 닿았다. 그날 광장에는 그것을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143년 뒤 같은 광장에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이번에는 돌이 아니라 소리를 보러 왔다.

광장

콩코르드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다. 건축가 앙주자크 가브리엘이 설계해 1772년에 완성했다. 혁명기에는 이름이 혁명 광장으로 바뀌었고,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됐다. 같은 해 10월 16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뒤를 이었다. 1795년, 혁명의 혼란 뒤 화해의 몸짓으로 광장은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니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을 기리는 프랑스의 국경일 밤에 이 광장에서 공연을 연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공연의 제목은 「파리 블뢰 블랑 루주」, 파랑 하양 빨강. 프랑스 국기의 세 색이다.

그날 밤

자르는 서른 살이었다. 3년 전 Oxygène이 세계로 퍼졌고, 일곱 달 남짓 전 Équinoxe가 나왔다. 그때까지 전자음악은 무대에서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이 공연을 조직한 사람으로 TF1 방송국의 예능 책임자 장미셸 에프를 꼽는다. 음악 매체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가 2016년 1월 7일에 실은 마이클앤젤로 마토스의 글에 따르면, 경찰과 시청은 공연 사흘 전부터 장비를 설치하도록 광장 일부를 막게 해 주었다. 리허설은 두 번 했다.

무대 위에는 자르 한 사람이 섰다. 신시사이저가 그를 둘러쌌고, 그 가운데 몇 대는 뒷날 그와 함께 일하게 되는 프랑시스 랭베르가 댔다. 랭베르는 그때 코르그의 시연 담당이었다. 광장에는 조명과 레이저가 번쩍였고, 둘레 건물의 벽에 거대한 영상이 비쳤고, 하늘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 무렵에는 무대 뒤 대형 화면도, 조명과 영상을 음악에 자동으로 맞추는 장치도 없었다. 신시사이저를 서로 잇는 규격 MIDI 도 아직 나오기 전이었다. 자르는 시퀀스를 손으로 걸어 가며 거의 모든 것을 실제로 연주했고, 커다란 헤드셋으로 조명 쪽과 말을 주고받으며 신호를 냈다. 은색 재킷을 입은 것도 같은 까닭이었다. 마토스의 글에 옮겨진 자르의 말로는, 멀리서도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속임수였다.

영어 위키백과는 공연 길이를 40분으로 적는다. 공식 사이트의 곡목은 Oxygène 과 Équinoxe 의 곡으로 채워져 있고, 마지막 곡은 「Oxygène Part IV」 다. 공연은 유로비전을 타고 유럽의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몇 명이 왔나

숫자는 이 밤의 가장 큰 수수께끼다. 자료를 하나씩 놓으면 이렇다.

기네스 기록 이야기도 따라다닌다. 자르의 공식 약력과 위키백과는 이 공연이 자르의 첫 기네스북 기록이 됐다고 적는다. 다만 기네스 세계기록 누리집에서 이 공연의 기록은 찾지 못했다. 거기서 찾은 자르의 기록은 1997년 9월 6일 모스크바 공연이다. 표를 산 관객 50만 명과 둘레 언덕에서 지켜본 약 300만 명을 따로 센다. 1979년 인쇄본 기네스북에 무엇이 실렸는지는 그 책을 직접 보지 않고는 확인할 수 없다.

광장의 넓이는 7.6헥타르다. 사람이 광장 밖으로 얼마나 넘쳤는지 센 기록은 찾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준비한 사람들도, 자르 자신도 그만큼 올 줄 몰랐다. 프랑스어 위키백과는 그 인파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조직한 사람들과 자르 자신을 크게 놀라게 했다고 적는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

자르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고 했다.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에도, 『뉴스위크』 에도 같은 말을 했다. 음반은 곧바로 반응했다. 7월 14일부터 8월 31일 사이에 그의 음반이 80만 장 더 팔렸다.

공연 뒤 스튜디오를 떠나 도시로 나간 자르의 길은 여기서 시작한다.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자르는 이 공연이 하나의 사건이 되면서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같은 종류의 무대를 열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고 했다. 1981년 중국, 1986년 휴스턴, 교황 방문 때의 리옹, 러시아, 이집트의 피라미드. 1990년 7월 14일에는 파리 라데팡스에서 다시 무료 공연을 열었다. 1995년판 기네스북이 적은 그날의 관객은 250만 명이다. 휴스턴과 모스크바의 숫자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자르의 도시 공연에는 늘 숫자가 둘 이상 따라붙는다.

그날 밤을 담은 것은 30분짜리 영상 테이프 「Jarre à la Concorde」 와 같은 이름의 싱글 한 장이다. 싱글에는 영상과 같은 판의 「Équinoxe Part 7」 과 긴 「Équinoxe Part 8」 이 들어갔다.

이렇게 들어라: 그 밤을 귀로 확인하는 두 곡

친구에게 보낼 한 곡

「Oxygène Part IV」 를 보낸다. 4분 14초라고 미리 말해 둔다. 그리고 이 사실을 함께 알려 준다. 1979년 7월 14일 이 곡으로 끝난 공연에 몇 명이 왔는지, 그날 밤 기자는 15만 명이라 했고, 자르는 100만 명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정확히 세지 못한 밤이다.

오벨리스크는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1836년에는 그것을 세우는 것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였고, 1979년에는 그 뒤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고 모였다. 돌은 두 번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서 구하나

그날 밤의 곡은 두 음반에 다 들어 있다. 판본 이야기는 Équinoxe와 Oxygène 편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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