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할레셰스 우퍼의 극장 건물. 옥상에 파란 HAU 간판이 서 있고 앞에 잎 진 나무들이 있다Photo: Raimond Spekking (Commons 사용자 Raymond, 자작)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Fifty years ago · No. 29

1970년대 서베를린, 이 음악이 자란 도시

극장이 문을 닫은 뒤에야 열리던 뒷방, 빌린 공장에서 돌린 녹음기 한 대, 스튜디오 구석에서 잠자던 무그. 탠저린 드림과 클라우스 슐체를 키운 서베를린의 주소와 날짜를 따라간다.

짧게 말하면

저녁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빠져나가야 문이 열렸다. 크로이츠베르크, 란트베어 운하 북쪽 둑길 할레셰스 우퍼에 선 건물 한 채. 앞쪽은 1962년부터 샤우뷔네라는 극단이 쓰던 극장이었다. 뒤쪽의 넓은 방 두 칸은 밤에만 살아났다. 한 칸은 벽을 온통 하얗게, 다른 한 칸은 온통 검게 칠했다. 방 안에는 악기와 앰프, 스피커가 널려 있었고, 들어온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여기가 조디악 프리 아츠 랩이다. 극장 공연을 소음으로 덮지 않으려면 그래야 했다. 그래서 이 방의 소리는 늘 밤늦게 시작됐다.

섬이라는 조건

이 음악이 1970년대의 서독 땅에서 태어난 사정은 「이런 음악들이 1970년대에 탄생된 배경」에서 크게 짚었다. 그 글에서 서베를린을 온실이라고 불렀다. 이번에는 그 온실 안으로 들어가 주소와 날짜를 하나씩 확인한다.

1961년 8월 13일, 장벽 공사가 시작됐다. 그날부터 서베를린은 동독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 됐다. 섬의 법은 서독과 달랐다. 도시는 전승 4개국의 관리 아래 있었고, 그 권리 때문에 서독의 병역법이 서베를린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서베를린 시민은 징병 대상이 아니었다. 서독의 청년들이 이 도시로 주소를 옮겼다. 법으로는 여전히 병역 의무가 남았지만 병무청의 손이 섬까지 닿지 않았다. 독일어 위키백과가 베를린 일간지 『타게스슈피겔』 을 인용해 적은 수는 약 5만 명이다.

섬에 사람을 붙드는 돈도 있었다. 1971년부터 서베를린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월급의 8%를 세금 없이 더 받았다. 베를린 수당이라는 제도다.

그런데 이 음악의 한가운데 선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다. 병역을 피해 건너왔다는 기록이 남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클라우스 슐체는 1947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페터 바우만은 1953년 서베를린에서 태어났다. 크리스토퍼 프랑케는 열세 살에 베를린에서 밴드를 만들었다. 에드가 프뢰제는 베를린에서 그림과 조각을 공부했다. 징병 면제가 불러 모은 것은 이들보다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이었다. 밤새 뒷방에 앉아 있을 청년들이 이 섬에 모였다.

할레셰스 우퍼의 뒷방

조디악을 연 사람은 셋이다. 콘라트 슈니츨러, 한스요아힘 뢰델리우스, 보리스 샤크. 영어 위키백과는 1968년 봄에 열었다고 적고, 독일어 위키백과는 1967년 말이라고 적는다. 닫은 때는 두 쪽 모두 1969년 초로 같다. 몇 달밖에 버티지 못했다. 왜 닫았는지는 기록에 없다.

그 몇 달 동안 이 방을 거쳐 간 이름이 뒷날 한 장르를 이룬다. 애시 라 템펠, 뒷날 아지타치온 프라이가 되는 디 아지타치온, 클라우스 슐체, 그리고 탠저린 드림. 탠저린 드림은 석 달 동안 이 방에 자주 섰다. 하룻밤에 5시간에서 6시간씩, 돈은 거의 받지 않고 연주했다. 노래는 부르주아의 것으로 치던 방이었다. 1969년에는 슈니츨러와 뢰델리우스가 디터 뫼비우스와 함께 클루스터를 만들었다.

건물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샤우뷔네는 1981년에 쿠어퓌르스텐담 쪽으로 옮겼고, 옛 극장은 지금 헤벨 암 우퍼의 두 번째 무대, HAU 2 가 됐다.

1969년 10월, 빌린 공장

조디악이 닫힌 그해 가을, 프뢰제는 새 사람들과 녹음을 했다. 북에 클라우스 슐체, 첼로와 바이올린에 콘라트 슈니츨러. 장소는 베를린의 빌린 공장이었고, 장비는 2트랙 레복스 녹음기 한 대였다. 1969년 10월의 일이다.

프뢰제는 1994년 『사운드 온 사운드』 와 한 이야기에서 그 녹음을 이렇게 돌아봤다. 마른 콩을 담은 체, 낡은 사무용 계산기, 쇠막대 두 개, 뻣뻣한 양피지. 부엌과 사무실에서 가져온 물건을 마이크 앞에서 두드리고 흔들어 리버브와 딜레이에 걸었다. 돈이 없어 소리를 레복스 한 대에 곧장 받아 담았다. 이걸 판으로 찍어 줄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찍어 준 사람이 있었다. 1970년 6월, 이 녹음은 Electronic Meditation 이라는 이름으로 신생 레이블 Ohr 에서 나왔다. 판이 나오기도 전에 슐체는 순회공연 도중 밴드를 떠났고, 그 빈자리에 프랑케가 들어왔다.

베를린의 밴드, 쾰른의 레이블

탠저린 드림과 애시 라 템펠, 슐체까지 베를린의 이름이 모인 Ohr 는 정작 쾰른 사람이 세운 레이블이다. 레이블을 만든 롤프울리히 카이저는 쾰른의 음악 기자였다. 돈을 댄 사람은 베를린의 음악 출판사 한자를 이끌던 페터 마이젤이다. 1969년에 둘이 손을 잡았고, 배급은 메트로놈이 맡았다.

그래서 탠저린 드림의 다음 세 장, Alpha Centauri 와 Zeit 와 Atem 은 베를린이 아니라 쾰른 근처에서 녹음했다. 레이블이 권한 디터 디르크스의 8트랙 스튜디오였다. 베를린에서 자란 소리를 테이프에 담은 곳은 라인강 가였다.

이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카이저는 음악가들이 모르는 사이에 즉흥 연주 녹음을 다른 이름으로 음반에 실었고, 슐체를 비롯한 음악가들이 법에 호소했다. 독일 법원은 카이저의 계약을 무효로 했다. 탠저린 드림은 1974년 영국 버진과 계약했다.

신시사이저 없는 교향곡

밴드를 떠난 슐체는 1972년 4월 베를린에서 첫 솔로 음반 Irrlicht 를 녹음했다. 부제는 「오케스트라와 전자 기계를 위한 4채널 교향곡」. 그런데 신시사이저가 없었다. 쓴 것은 고장 나서 손본 전기 오르간, 어느 관현악단 리허설을 녹음한 테이프, 망가진 앰프였다. 슐체는 2005년에 이 판을 두고, 그때까지도 신시사이저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셋째 악장 「Exil Sils Maria」 는 거꾸로 녹음됐다. 판을 거꾸로 돌리면 원래 녹음한 모양으로 들린다. 없는 장비를 탓하지 않고 테이프를 뒤집은 사람의 음반이다.

한자 스튜디오의 무그

프랑케의 이야기는 한 스튜디오에서 이어진다. 프랑케는 음악 선생 토마스 케슬러 덕분에 전자음악에 눈을 떴다. 스위스 작곡가 케슬러가 빌머스도르프 팔츠부르거 슈트라세 30번지에서 이끌던 일렉트로닉 비트 스튜디오는 아지타치온 프라이와 애시 라 템펠, 초기 탠저린 드림이 연습하던 곳이다. 지금 그 건물에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한자가 있었다. 프랑케가 『사운드 온 사운드』 에 한 말을 옮기면 이렇다. Zeit 를 만들 무렵 그에게는 신시사이저가 없었다. 대신 한자 스튜디오에 큰 무그 모듈러가 한 대 있었다. 롤링 스톤스가 1967년 영화 작업에 쓰고 싸게 넘긴 것이었는데, 스튜디오에는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설명서도 없었다. 프랑케는 밤마다 스튜디오에 들어가 그 기계를 붙들고 앉았다. 1973년까지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는 못했고, 2년 동안 거기서만 연습했다. 그가 파고든 쪽은 시퀀서였다. 끊이지 않는 리듬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기능이다. 프랑케는 몇 시간이고 시퀀스를 짰다. 프뢰제가 그 소리를 듣고, 이 밴드에 딱 맞는 리듬이라고 여겼다.

버진과 계약하자 프랑케는 선금 일부로 그 무그를 샀다. 그 뒤의 이야기는 영국 시골집에서 녹음한 Phaedra 로 이어진다. Phaedra 편에 적은 그 여덟 음의 시퀀스는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두 해 동안 밤마다 자랐다.

장벽에서 150미터

1975년 마이젤 형제는 크로이츠베르크 쾨테너 슈트라세 38번지 건물을 사들였다. 안에는 마이스터잘이라는 큰 녹음실이 있었고, 건물은 장벽에서 15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장벽 옆 한자」 라고 불렀다. 1976년에 데이비드 보위와 이기 팝이 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탠저린 드림도 1976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해 윌리엄 프리드킨의 영화 Sorcerer 음악은 베를린의 낡은 영화관을 빌려 작은 스튜디오로 꾸미고 녹음했다. 애비 로드에서 쓰다 팔려 나온 8트랙 앰펙스가 그 방에 들어갔다. 8월에는 오케스트라 녹음에 쓰던 오디오 스튜디오스에서 Stratosfear 를 녹음했다. 뒷방과 빌린 공장에서 시작한 밴드가 7년 만에 고향의 제대로 된 녹음실로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들어라: 이 도시를 귀로 확인하는 두 곡

친구에게 보낼 한 곡

「Journey Through a Burning Brain」 을 보낸다. 12분이 넘는다고 미리 말해 둔다. 그리고 이 사실을 함께 알려 준다. 탠저린 드림의 맥박이 된 시퀀서 소리는 한 청년이 베를린 한자 스튜디오에서 2년 동안 밤마다 연습한 무그에서 나왔다. 프랑케의 말로는 그 무그는 롤링 스톤스가 쓰다 넘긴 것이었다.

장벽이 섬을 둘렀고, 섬 안에서는 극장이 닫혀야 뒷방이 열렸다. 이 음악은 그렇게 남들이 잠든 시간에 남이 쓰던 방에서 자랐다. 할레셰스 우퍼의 그 건물은 지금도 운하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극장 불이 꺼질 시간에 이 음반을 걸면, 그 뒷방의 불이 켜진다.

어디서 구하나

두 판 모두 지금도 CD 와 LP 로 구할 수 있다.

Electronic Meditation 앨범 표지Electronic Meditation · Amazon새 CD·LP 검색 결과.Electronic Meditation 앨범 표지Electronic Meditation · Discogs발매된 모든 판과 중고 매물.
Irrlicht 1972년 Ohr 초판 앨범 표지Irrlicht · Amazon새 CD·LP 검색 결과.Irrlicht 1972년 Ohr 초판 앨범 표지Irrlicht · Discogs발매된 모든 판과 중고 매물.